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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4장]요나서의 마지막은 하나님을 향한 요나의 항변과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으로 마무리됩니다.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다소 허무하게 보이는 결론입니다.하나님의 답변을 들은 요나가 무엇을 깨달았다거나어떻게 변화되었다는 내용이 이어지지 않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요나서의 결론을 통해요나서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우선, 요나서에서의 하나님은 '니느웨'를 아끼셨습니다.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여 명이고, 가축도 많았습니다.하나님께서는 큰 성읍 니느웨의 회개를 기뻐하셨고,그들을 향한 재앙도 돌이키셨습니다.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단순히 니느웨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하나님께서 택하셨던 '요나'에게도 향해 있었습니다.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했습니다.그리고 그의 사역은 분명 '성공'이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요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여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말씀하셨고박넝쿨을 통해 요나를 세심하게 가르치셨습니다.하나님의 말씀으로 요나서의 마지막을 장식한요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오늘도 작은 나를 기다리시고,나를 세심하게 배려하시고,나에게 다가와 말씀하시며,나를 가르치시고 변화 시키시는,겸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두고자 함이 아니었을까요?우리는 사역의 현장에서 외적인 변화만을 가리켜서 그 성공 여부를 판단합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모습대로 내가 변화되기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119:171)
view more +[디모데후서 4:9~22]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동시에 그의 생애에 쓴 마지막 서신서이기도 합니다.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당시,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습니다.바울은 자신이 마지막 때임을 예견하며, (6)디모데에게 몇 가지 부탁할 내용을 다급하게 편지에 적었습니다.그런데 다소 의외인 내용이 있습니다.자신에게 속히 오되,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13)신앙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을까 싶지만,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오라고 재차 강조하는 바울의 말을 비춰본다면, (21)그가 감옥에서 굉장한 추위를 느끼고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당시 로마 감옥은 죄수를 위해 배려하는 시스템이 없었습니다.추위가 찾아오면 죄수는 맨바닥에서 그 냉기를 그대로 느껴야 했으며,심지어 음식조차도 죄수가 지인들을 통해 알아서 공급 받아야 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사도 바울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복음을 위한 투사 같은 이미지입니다.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으며,어떠한 고난과 역경 앞에도 꿈쩍하지도 않는 인물이었습니다.어쩌면 우리와는 다른, 슈퍼맨 같은 사람으로 떠올리곤 합니다.사도 바울의 사역 이야기를 보면서도'에이~ 이건 사도 바울이니까 할 수 있는 거지' 라며 선을 긋곤 합니다.그러나 사도 바울 역시도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었습니다.추위와 배고픔과 아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에게도 동일한 것이었습니다.그 역시도 기도를 통해 육신의 본능을 꾸준히 눌렀고, (롬 7)그런 그를 통해 성령님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었습니다.사도 바울처럼, 나의 뜻이 아닌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올려드리며 순종할 때성령님께서 우리를 통해서도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 14:36)
view more +[요한복음 1장]신약성경에는 4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그 중 마태/마가/누가복음은 비슷한 관점으로 쓰였다고 하여 '공관복음'이라 불립니다.반면 요한복음은 그 관점이 다른 복음서들과 다소 다릅니다.사실 복음서가 처음 기록된 시점은,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약 30년이 흐른 뒤였습니다.예수님의 재림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보다 지연되었고,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세상을 뜨자,복음의 내용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기 위하여 '복음서'가 기록됩니다.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이 차례로 기록되었고,예수님을 실제로 보지 못한 교회의 구성원들은이제 복음서를 토대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접하기 시작합니다.그런데 교회 공동체의 리더로 오랫동안 사역했던사도 요한이 보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신자들이 예수님의 신비스러운 사건들에만 집중한 나머지,정작 예수님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실 때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베푸신 떡과 물고기에만 집중하고,떡과 물고기를 베푸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놓쳤던 것과 같았습니다.이에 사도 요한은 느지막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되는데,그의 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한 포커스가 맞춰져 있습니다.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 자체이심을 강조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요한복음의 방향성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선사합니다. v 우리는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합니다.그런데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계신가요? v 우리는 예수님의 좋은 말씀들은 잘 외우고 있습니다.그런데 그 말씀을 오늘도 행하시는 예수님은 경험하고 계신가요? v 우리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크리스마스를 기다립니다.그런데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은 얼마나 기다리고 계신가요?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view more +[역대상 21장]오늘 본문에서 사탄은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했습니다.다윗 왕이 이스라엘을 계수한다는 것은,자기 손으로 부릴 수 있는 이스라엘의 규모를 확인하고, 이를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자 하는 '교만'입니다.다윗의 교만을 악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치시는데, 이 때 죽은 자가 7만 명에 달합니다.이 사건은 사무엘하 24장에서도 함께 기록하고 있습니다.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윗을 격동시킨 '주체'입니다. 그 주체가 역대상 21:1에서는 사탄이고, 사무엘하 24:1에서는 여호와입니다.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이는 다윗의 내면에 이미 교만의 죄가 싹을 틔웠는데,사탄은 다윗이 '죄를 짓도록' 하기 위해 그를 충동시켰고,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이를 용인하신 겁니다.이 일을 통해 다윗은 자신 내면에 숨어 있던 죄를 '대면'하게 되었고,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아 '회개'하게 됩니다.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설명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우리의 내면에도 수없이 많은 '은밀한 죄악'들이 숨어 있습니다.그것이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죄악일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들도 모두 아십니다.나의 내면에 숨어있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삶,그렇게 점차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를 이루는 삶,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닐까요?나의 초라함이 나타난 그 자리에서 인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시길 소망합니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view more +[시편 131편]시편 131편은 시편 제5권에 속해 있으며, '신뢰에 대한 노래'입니다.131편의 기자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130편과 맥락이 이어지는 점을 비추어 볼 때 '다윗'으로 무리 없이 보고 있습니다.다윗 왕은 수많은 업적을 세운 인물입니다.하나님께서도 다윗을 향해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하시며,다윗 이후의 왕들을 평가할 때 그 기준점을 다윗으로 두기도 하셨습니다.그러나 수많은 업적을 세웠던 다윗이었지만,그가 시편 131편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절제'였습니다.내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기 위해 애쓰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주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쉬지 않고 사역에 뛰어듭니다.정말 값진 헌신이지만,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잠시 멈출 것을 가르칩니다.우리의 영혼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품 안에서 누리는 고요함과 평온함입니다. 오늘 나의 영혼은,많은 일로 인해 근심하고 있습니까?주님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까?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42)
view more +[사도행전 27장]본문 속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배를 타고 가는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는데, 위험을 예감한 바울은 항해를 잠시 멈출 것을 권합니다. (1~10절)그러나 백부장은 죄수의 신분이었던 바울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항해를 강행합니다. (11절)결국 배는 얼마 되지 않아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들은 짐과 배의 기구까지 내버리며 버티지만, 구원의 여망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20절)그 때 사도 바울이 서서 말합니다."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1~25절)이제 백부장과 군인들은 바울의 말을 신뢰하고 그의 분부대로 움직입니다. (31절 이하)그리고 그들은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우리는 세상에서 다양한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때로는 우리의 모습이 세상적인 기준에서 다소 초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에 당장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길을 알고 있으며,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생명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하는 이들에게우리가 믿고 있는 '진짜 생명'을 담대히 전하십시오.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view more +[시편 8편] 시편 8편은 장막절 밤에 자주 불렸던 노래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장막절은 초막절, 수장절이라고도 하는데,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주일간 텐트에서 지내면서, 과거 광야에서 자신들을 돌보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입니다.야외에서 맑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마도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절로 묵상되지 않을까 싶습니다.오늘 시인도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보며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3절)그러다가 문득 사람이라는 존재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4절)여기서 사람이라는 단어로 사용된 히브리어는 '에노쉬'(אֱנוֹשׁ)입니다.그 뜻이 '아담'(אָדָם)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경우에 따라서는 '악한 사람', '깨지기 쉬운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시인이 보기에도 사람이라는 존재는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연약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연약한 사람을 생각하셨고, 돌보셨습니다.그리고 우리를 감히 하나님과 비교해주시며, 우리에게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5)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내 자신의 한계와 현실을 바라보면, 초라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하지만 그런 연약한 우리를 생각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믿음으로 다시 일어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view more +[시편 1편]우리는 대개 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물론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 것이 맞습니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복 받은 사람'보다 '복 있는 사람'에게 더 주목하십니다.예수님께서도 팔복을 말씀하실 때 '복이 있는 사람'을 말씀하셨지요. (마 5)외부에서 받는 복도 좋지만, 내면에서 갖춰 나가는 복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시편 1편도 '복 있는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시편 1편은 특별히 복 있는 사람을 악인과 구분하고 있습니다.복 있는 사람은 형통함을 누리다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만,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더러는 악인들의 꾀를 따라가다가(walk), 죄인들의 길에 서고(stand), 끝내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아(sit) 버립니다.악인의 꾀에 빠진 것이 비록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을지라도,결국은 죄의 자리에 '정착'하고, 죄인들과 '연합'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달콤한 죄의 유혹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외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오늘 본문 2절은 악인의 꾀에 빠지지 않는 비결을 소개하고 있는데,그것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죄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도 좋지만,죄의 유혹을 마주할 틈조차 만들지 않는 것이 더 훌륭한 지혜입니다.'복 있는 사람'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죄가 아닌 말씀의 달콤함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6:7)
view more +[사무엘하 23:24~39]성경을 읽다 보면,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된 본문은 지루해서 넘기기가 쉽습니다.그러나 다시 들여다 보면, 오늘 그 이름이 열거된 다윗의 신하들은,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성경에 그 이름이 영화롭게 기록된 사람들입니다.다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영원히 기억하실 이름들입니다.그렇다면 성경에 이름이 영화롭게 기록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그들은 업적의 많고 적음을 떠나, 다윗의 편에서 그에게 끝까지 충성한 사람들입니다.다윗의 뜻을 중간에 배반하거나, 압살롬의 편으로 떠나 버린 사람들은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했습니다.그러나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더라도,다윗을 떠나지 않고 평생 그에게 충성한 사람들은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영원히 기록된 것입니다.반면 세상에서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남겼더라도,그것이 가이샤를 위해 충성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주목하지 않으십니다.오늘 우리는 누구의 편에 서 있습니까?신앙은 ‘컨디션’보다 ‘포지션’이 중요합니다.나에게 대단한 능력이 없고, 이 세상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지라도 괜찮습니다.우리가 영원히 예수님의 편에 서 있기만 한다면,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영원히 기억하실 겁니다 :)
view more +[요한복음 6장]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신 후, 그의 주변에는 더욱 많은 군중들이 몰려 들었습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어려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31~58)결국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은 수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곁을 모두 떠나 버렸습니다. (66)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나를 떠날 것인지를 물어보셨습니다. (67)베드로는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면서, 영생의 말씀이 오직 주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68)사실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도 이해되기 어려운 내용이었을 겁니다. (60)예수님의 살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도 이해되지 않았겠지만, 예수님의 피를 마시라는 말씀은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을 겁니다.당시 율법에 따르면 피를 마시는 행위는 죄를 범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그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꼭 마셔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겁니다.그러나 군중들과 달리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제자들과 군중들은 자신의 믿음의 근거를 달리 두고 있었습니다.군중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만을 믿었습니다.그러나 제자들은 설령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예수님'이라는 분께 믿음의 근거를 두었기에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오직 예수님께 있기를 소망합니다.말씀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씀만을 듣거나, 듣기에 좋은 말씀만을 기억하기가 쉽습니다.그러나 때로는 말씀이 당장 이해되지 않더라도, 때로는 말씀이 내 안에서 부담감으로 다가올지라도,예수님이라는 반석 위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켜내시기를 축복합니다.
view more +2007년, 영화 "밀양"이 개봉했습니다.영화에서 주인공 이신애(전도연)는 유괴범으로부터 자신의 아들이 살해되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이신애는 그 후로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결정하고 그가 수감된 교도소로 찾아갑니다.그러나 유괴범은 그녀에게 충격적인 말을 꺼냅니다.수감생활 중 자신도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께로부터 모두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이신애에게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미 자유해진 모습을 보인 것이지요.이신애는 아직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실 수 있냐며, 충격을 받고 결국 정신병을 얻게 됩니다.그러나 유괴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았다면, 이신애에게 다른 태도로 나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구약의 5대 제사 중 '속건제'가 있습니다.속건제의 독특한 점은, 성막에서의 제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레위기 5장과 6장에는 부지중에 여호와의 성물을 범한 경우와 이웃에게 손해를 끼친 사례가 나옵니다.잘못을 범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용서를 구해야 하지만,제사를 드리기 전, 손해를 끼친 값에 5분의 1을 추가로 더해서 상대방에게 배상하는 절차를 꼭 선행해야 합니다.더 나아가 출애굽기 22장에서는 고의적인 도둑질에 대해 4~5배로 배상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이 경우는 자신의 범죄가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드러나게 된 경우입니다.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자신이 손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4배로 갚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눅 19:8)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인정했던 것이며,이에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임했다고 선언하신 겁니다.우리는 타인에게 잘못을 범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만 회개하고 그칠 때가 많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에게도 책임감 있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용서를 구해야 하는 경우에는 용서를 구해야 하고,배상이 필요한 경우에는 배상까지 철저히 해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사'보다 '배상'을 먼저 요구하셨습니다.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view more +한 여인이 말했습니다."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가 행복이었는데그때는 그걸 몰랐군요.."지혜자가 물었습니다."지금은 행복하지 않습니까?"그녀는 한숨으로 대답합니다."좋은 시절은 다 지나가 버렸지요.."지혜자는 다시 말합니다."시간이 좀 더 흐르면지금이 행복했었다고 다시 말하게 될 것입니다.깨닫는 순간이 항상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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