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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22:21)우리는 대체로 성경의 첫 구절은 잘 기억하는 반면, 성경의 마지막 구절은 잘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성경의 마지막은,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기를 바란다는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그려낸 책입니다.마지막 때에 성도를 향한 여러 모양의 핍박과 박해, 그리고 유혹들이 있겠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잘 견뎌낼 것을 성도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요한계시록 22장 21절은,성도가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일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어떤 사본은 해당 구절의 '모든 자들에게'를 '모든 성도에게'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요한계시록이라는 편지가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에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해석입니다.결국 요한계시록 22:21을 '모든 성도에게'로 번역하여 다시 쓰면,"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성도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 됩니다.성도가 마지막 때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주 예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함을 나타냅니다.이미 승리하셨으며, 장차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
view more +성경을 펼치면 창세기 1장 1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에게는 그만큼 익숙하면서도 어려움 없이 이해되는 내용입니다.그러나 창세기 1장 1절은 우리에게 큰 믿음을 요구합니다. 창세기가 기술되던 당시에는 '다신론'의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문화권마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지만,우주는 신들의 전쟁으로 발생한 충격에 의해 생성되었고, 신들은 우주 곳곳에 스며들어 자신의 권역을 누리고 있다고 보았습니다.그래서 태양의 신, 바다의 신, 땅의 신 등으로 다양하게 구분되었으며, 민족 간의 전쟁 역시도 신들의 전쟁으로 확장해서 생각했습니다.다른 민족들은 이스라엘이 믿는 신을 '산(山)의 신'이라고 오해하기도 했습니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창세기가 기록되었습니다.창세기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기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었기에, 그들 역시도 다신론이 익숙했습니다.출산 상황에서는 그에 맞는 신을,노동 상황에서는 그에 맞는 신을,전쟁 상황에서는 그에 맞는 신을 찾아 다녔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과정에서 10가지 재앙을 통해 모든 우상들을 깨버리십니다.그리고 모세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이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온 세상에 유일한 신이심을 선포하는 동시에,이제는 우리가 다른 우상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춰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여러분은 모든 상황 속에서 변함없이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으십니까?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 121:1~2)
view more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43)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의 양 옆에는 '행악자 두 사람'도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예수님과는 달리 이들은 자신들의 죗값을 합당하게 치르고 있는 것이지요.한 행악자가 예수님을 비방하자, 다른 한 사람이 예수님을 변호하기 시작합니다.이 두 사람은, 어쩌면 세상에서는 죄악을 저지르는 일에 한 팀이었을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그런데 예수님을 변호한 행악자의 고백이 놀랍습니다."예수여 당신의 나라 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42)그는 예수님의 나라가 따로 있음을 고백하며,예수님이 그 나라의 왕이심을 믿고 있었습니다.그렇게 그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구원 받은 이 행악자를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와, 평생을 자기 멋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구원까지 받았네?'그러나 어쩌면 그 행악자야말로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한 우리를 부러워할지 모릅니다.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이 땅에서부터 영원토록 예수님의 나라에 거하며,참 자유와 평안을 누리시는 크리스천메이트 회원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view more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23:34)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동안예수님의 원수의 편에 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예수님을 팔고 배신한 자,예수님을 고발하고 체포한 자,예수님을 조롱하고 죽인 자...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를 대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모세를 대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엘리사를 대적했던 어린 아이들이 대표적인 사례이지요.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위해 '용서' 를 구합니다.그간 중엄했던 하나님의 심판의 무게를 생각하면,오늘 예수님께서 베푸신 용서의 무게 역시도 굉장히 중엄한 것입니다.그리고 예수님의 용서가 있었기에이 사람들은 얼마 지난 후, '예수님을 믿는 성도' 가 될 수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36~41)감사하게도, 예수님의 용서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비록 우리가 지금은 예수님 앞에서 연약한 모습만 보일지라도,그 용서를 누림으로,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장성한 믿음의 사람들로 모두 자라나시기를 소망합니다.
view more +우리는 성경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순종이 쉽지만은 않습니다.왜일까요?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말씀이 과연 지금의 내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지금의 내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생각만을 나에게 강요하시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이 말씀대로 순종하다가 어려움을 겪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를 책임져 주실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며,이 땅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때문에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문제들은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데,이 중압감을 하나님께서도 과연 동일하게 알아주실지가 의문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옷을 입고 인간의 형체를 가지사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우리와 동일한 모습으로, 우리와 동일한 인생을 살아가시며,우리가 겪는 모든 아픔과 슬픔, 그리고 걱정과 고통들을 몸소 겪으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지식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체험에 따른 공감까지 하고 계십니다.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아시고 도우시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view more +[출애굽기 29:38~42]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하루에 두 번씩, 아침과 저녁마다 번제를 드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우리는 이를 상(常)번제라고 부릅니다.특별한 절기라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일상이었던 것입니다.그리고 42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상번제의 자리에서 우리와 만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출 29:42)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으신가요?베드로전서 2:9에 따르면,지금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우리를 제사장으로 세우셨고, 우리에게도 상번제의 의무가 있습니다.하나님은 왜 나를 만나주지 않으시는 건가 싶어 답답함을 느끼고 계십니까?어쩌면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지 모릅니다."나도 너를 만나고 싶단다. 그런데 내가 어디서 너를 만날 수 있는 거니?"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아침, 저녁으로 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는 것,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켜야 할 상번제입니다.여러분의 골방에서 하나님과 1:1의 만남을 가지십시오.
view more +[욥기 42장] 욥기의 마지막은 훈훈하게 마무리됩니다.우리는 욥이 받은 갑절의 소유와 명예, 그리고 아리따운 자녀들에 집중합니다.그리고 이것이,모든 시험을 통과한 욥이 받게 된 '복'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욥이 받은 진짜 복은,그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그리고 욥은 아직 자신의 건강과 재산이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욥 42:6).이는 욥이 자신의 형편과 관계없이하나님의 옳으심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신뢰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고난을 통과한 욥은 결국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크신 계획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술수에 '말려서' 욥을 시험하신 것이 결코 아녔습니다(욥 1:11; 2:6).비록 사탄의 이간질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마저도 선용하셨습니다.고난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욥을 더욱 단단하게 세워가셨습니다.지금도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 5:8).그러나 안심하십시오.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우리를 위해 신실하게 일하고 계십니다."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6~37)
view more +[출애굽기 26장]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내리신 하나님께서는 곧이어 '성막'을 지을 것을 함께 명령하십니다.성막의 기능은 무엇이었을까요?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율법을 모두 준행하겠다고 호기롭게 다짐합니다(출 24:7).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을 어길 것을 미리 아셨고,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써 성막 제작까지 함께 명령하셨습니다.결국 성막이란,거룩하신 하나님께서거룩하지 못한 인간들 사이에 오셔서우리를 만나시고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가시는 현장입니다.그리고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예수 그리스도의 거주를 예표합니다.지금 나는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습니까?그리고 그 분을 만나며거룩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까?
view more +[마태복음 2:1~6] / [미가 5:2~5]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때, 하늘에는 성탄의 소식을 알리는 별이 떴습니다.동방의 박사들은 그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을 경배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그런데 박사들이 향한 곳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예루살렘이었습니다.이는 '유대인의 왕이라면 당연히 예루살렘 궁전에서' 태어나실 거라는, 인간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헤롯의 명령으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메시아의 출생지를 조사하였고,미가서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 헤롯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태복음 2:5~6)이들 역시도 '메시아는 작은 곳에서 태어날 리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겁니다.그러나 이는 미가서의 원문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가 5:2)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작은 고을 베들레헴으로, 그것도 마구간으로 보내셨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스스로를 더 크고 화려하게 가꾸려 노력합니다.'왕을 맞이하려면 이 정도 수준으로는 갖춰 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나름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며 더 좋은 대학, 더 큰 직장, 더 높은 위치를 꿈꾸며 노력하지만,그러다가 되려 평강을 잃어버리곤 합니다.그러나 우리가 예루살렘 궁궐처럼 크고 화려하게 준비되어 있어야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더 화려해지기 위해 애쓰기보다는그리스도의 다스림 속에서 평강을 누리는 우리의 신앙이 되길 소망합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십시오.예수님은 평강이시며, 그 분께서 우리를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미가 5:2, 5:5)
view more +[아가서 1:1~7]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성경은 술람미 여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다만 70인역은 술람미를 '수넴 사람'이라는 말로 해석했습니다.이 해석대로라면 술람미 여인은 수넴 지역 출신으로,현재 예루살렘에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의 딸들과 달랐습니다.예루살렘 딸들이 자신의 외모를 가꾸고 있을 때술람미 여인은 오빠들의 포도원을 돌아다니며 농사일에만 매진해야 했습니다.땡볕으로 인해 피부도 새까맣게 타버렸습니다.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의 딸들 앞에서 주눅이 들었고, 예루살렘 딸들 역시 그런 술람미 여인을 바라보며 수군거렸습니다.그런데 기막힌 반전이 일어납니다.왕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여, 그를 궁궐 안으로 부른 것입니다."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아 1:4)그간 예루살렘의 거리를 소심하게 거닐던 술람미 여인은, 이제 왕의 궁궐까지도 당당하게 출입합니다.이제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 딸들의 수군거림이 아닌, '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세상의 평가에 주눅들던 술람미 여인은 이제 세상을 향해 외칩니다."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아 1:5)혹시 세상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을 갖추지 못하여 위축되시나요?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우리의 진짜 가치를 발견하고, 세상에서 그 사랑을 당당히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view more +[마가복음 5:1~20] 데가볼리는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10개의 도시 연합입니다. (막 5:20) 이스라엘에 속해 있었지만, 유대인들과의 교류는 없었습니다.데가볼리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경계하고 배척했으며,유대인들 역시 부정한 문화가 가득한 데가볼리로 향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데가볼리로 향하셨고,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고치셨습니다.그 누구도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지만,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적극적으로 다가오시고 개입하셨습니다.하지만 서글프게도,예수님의 선행을 똑똑히 목격한 데가볼리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기 시작했습니다.왜일까요?요한복음 3장 19절은 빛이 사람들에게 임하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진단합니다.사람들의 시선에서는,예수님 때문에 돼지 2,000마리가 몰살 당한 듯 보입니다.귀신보다 더 강한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이 앞으로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뒤바꾸실 지 모릅니다.우리는 어떤가요? 예수님은 선한 분이시며, 그 분을 통해 나에게 구원이 임한다는 사실을 알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데가볼리가 추구하는 성공의 기준이 따로 있듯이,21세기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기준도 따로 있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만 살면, 이 땅에서의 성공은 포기해야 할 거 같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나에게도 "이 땅에서의 재산은 포기하고 선교지로 당장 떠나라" 고 말씀하실 것만 같습니다.예수님으로 인해 내 삶이 마구 뒤흔들릴 것만 같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인격적입니다.자기 자식이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가 없는 것처럼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평안과 미래와 희망을 주길 바라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29:11)오늘 본문 속 귀신 들렸던 거라사인은 그 놀라운 사랑을 경험했습니다.그리고 예수님을 배척하던 그 데가볼리에서,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의 사랑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데가볼리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비결,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view more +미술에서 공백과 여백은 비슷해 보이지만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공백은 의미 없는 빈 공간일 뿐이지만, 여백은 작품의 아름다움을 위해 꼭 필요한 비움 입니다. 출애굽기 1장 1~7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400년의 시간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무려 400년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필요한 공간이 고작 7절뿐이라니… 마치 이스라엘에게 이 시간이 공백이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출애굽기 1:7- 하지만 이 말씀은 공백처럼 보이는 400년의 시간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위한 여백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시작된 70여 명의‘이스라엘의 아들들’은 400년 후 장정만 6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자손’이 되었습니다.-민수기 1:46- 하나님은 애굽이라는 강력한 나라를 인큐베이터 삼아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계셨던 것 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공백처럼 보이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시간이 공백이 아닌 여백이 됩니다. 이러한 인도하심을 확신한다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153감사노트 중 엮음 이찬수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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